[길가는 자의 빛] 카르마 > 신지학 (입문)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신지학 (입문)

길가는 자의 빛 [길가는 자의 빛] 카르마

페이지 정보

작성자 우주나무 댓글 0건 조회 3,001회 작성일 16-08-04 01:38

본문

저자 : 메이블 콜린스 
번역 : 김은경


카르마




개개인의 존재를 무한에서 무한으로 뻗어있는 밧줄이라고 상상해보자. 이 밧줄은 끝도 없으며 시작도 없고 결코 끊어지지도 않는다. 이 밧줄은 무수히 많은 섬세한 실들로 짜여져 있으며 서로 단단히 결속되어 굵은 밧줄이 된 것이다. 이 실은 색깔이 없으며 아주 곧고 강하고 반듯하다. 이 밧줄은 모든 곳을 지나치면서 여러 가지 불가사의한 뜻밖의 일들을 겪기도 한다. 상당히 자주, 실오라기 하나가 무언가에 걸려서 달라붙게 되어 버리는 경우도 생긴다. 또는 심하게 뽑혀 통상의 길에서 떨어져 나가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상당한 시간동안 그 실은 엉클어져 전체를 엉망으로 만든다. 때로는 하나의 실오라기에 더러움이 타거나 색깔이 묻어서 얼룩이 지기도 한다. 그러한 얼룩은 더러움이 탄 부분뿐만 아니라 다른 실들까지 더럽게 만들어 퍼지게 한다. 실들은 살아있는 것임을 명심하라. 마치 전선같이, 아니 전선이라기보다는 진동하는 신경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더러움이나 실의 뒤틀림이 얼마나 멀리까지 전달해 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끊이지 않고 연속적으로 독특한 하나의 실오라기를 만들고 있는 긴 끈, 살아있는 그 실은 그림자에서 밝음으로 나온다. 그 때에는 실은 이미 무색이 아니라, 황금색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실들은 가지런히 놓이게 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실과 실 사이에 또 다시 조화가 찾아드는 것이다. 그러한 조화의 내면에서 보다 더 큰 조화를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비유는 진리의 단지 작은 부분만을 제시해 준 것에 불과하다. 하나의 단면보다도 더 적은 부분이다. 그러나 곰곰이 잘 생각해 보아라. 이 설명으로 어쩌면 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될 지도 모른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은, 미래는 현재의 개별적인 행위에 의해 어떤 목적도 없이 제멋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현재가 과거와 연속해 있는 것처럼 미래의 전체도 현재와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느 한 면, 하나의 관점에서 보면, 밧줄을 예로 든 설명은 옳다고 볼 수 있다. 


오컬티즘에 약간의 주의만 기우려도 결과적으로 커다란 카르마를 낳게 된다고 한다. 그것은 선과 악이라고 보통 흔하게 말하고 있는 양자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지 않고서는 오컬티즘에 주의가 쏠리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오컬티즘에서 첫 걸음을 내디디면, 학도는 지식의 나무에 이르게 된다. 학도는 열매를 따서 먹어야만 하는 것이다. 즉,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무지에서 비롯된 우유부단한 태도는 이제 허락되지 않는다. 선의 길을 가든지 아니면 악의 길을 가든지 둘 중 하나로 나가야 한다. 명백하며 확고한 의식에서는 단 한 걸음만 내딛게 되어도 결과적으로 커다란 카르마가 따르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갈 목표에 대해 확신이 없이 배회한다. 자신들의 삶에 대한 기준이 불명료하므로 결과적으로 카르마는 모호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지식의 입구에 이르게 되면 혼란이 줄어들기 시작하고 결과적으로 카르마적인 성과는 대단히 불어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각기 다른 모든 계에서 같은 방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오컬티스트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모호한 태도가 용납되지 않으며 자신이 지나온 입구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이러한 것들은 어른이 다시 아이로 돌아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것이다. 성장의 단계에 있기 때문에 개인은 책임을 져야하는 상태에 근접해 있다. 결코 후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카르마의 족쇄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사람은 그 자신의 개성을 그림자 속에서 일으켜 빛으로 들어올려야 한다. 더 이상 실들이 더러운 물질에 닿지 않도록, 끌려나가서 달라붙지 않도록 자신의 존재를 고양시켜야만 한다. 카르마가 작용하고 있는 영역에서 자신을 들어올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자신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생활을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땅바닥은 울퉁불퉁하고 더러우며 더럽혀진 꽃가루를 담고 있는 수많은 꽃들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을 달콤한 것들로 덮이어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머리 위에는 자유로운 하늘이 있다. 카르마가 없는 상태를 바라는 사람은 먼저 바람으로 집을 삼고 그 다음에는 에테르를 집으로 삼아야 한다. 좋은 카르마를 만들어보고자 하는 사람은 여러 갈래의 혼란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자신을 위해 수확하고자 좋은 씨를 뿌리려고 하는 노력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잡초를 심게 한다. 그 중에는 거대하게 자라날 것들도 있다. 자신이 수확한다는 생각을 갖고 씨를 뿌리지 마라. 세계를 양육할 과실의 씨를 뿌린다는 바램을 갖고 씨를 뿌려라. 그대는 세계의 일부이다. 세계에 자양분을 주는 것은 자신에게 양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 속에는 커다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오랫동안 자신이 선을 위해 일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장 깊은 내면에서는 오직 악을 인식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즉, 자신이 이 세계를 대단히 이롭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계속해서 무의식적으로 카르마에 대한 생각을 끌어 앉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행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자원봉사는 자신을 위한 것이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보상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거부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거부 자체를 통해 보상을 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자 스스로 자기 스스로 점검해 가면서 배우려고 노력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혼에 씌운 족쇄를 풀어야 하고 바램은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보상이나 벌도 없고, 선이나 악도 없는 상태에 확고하게 발을 들여놓기까지는 모든 노력이 허사이다. 제자는 큰 진보를 해 낸 것처럼 보일 지 모르지만, 언젠가 자신의 혼과 대면하게 될 것이다. 그가 지혜의 나무에 이르렀을 때, 자신이 달콤한 과일이 아닌 쓰디쓴 과일을 선택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베일은 완전히 흘러내리고, 자신의 자유를 단념하고 욕망의 노예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오컬티즘의 삶으로 향한 그대여 조심하라. 보이지도 않으며 소리도 없는 것에 시력과 청력을 집중하라. 그것 외에는 욕망에 대한 치유, 보상을 바라는 마음에 대한 치유 그리고 갈망의 고통에 대한 치유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배워라. 지금에라도 실천에 옮겨라. 그렇게 하면 수천 마리의 뱀들이 그대가 가는 길에서 비켜서게 될 것이다. 영원 속에서 살아가라. 


카르마의 실제 법칙의 작용은 제자가 더 이상 카르마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되는 지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배우게 될 것이다. '비전을 받은 자'는 자연의 비밀을 물을 권리가 있으며 인간 생활을 지배하는 규칙들을 알 권리가 있다. 비전을 받은 자는 자연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그리고 인간 생활을 지배하는 규칙들에서 해방됨으로써 이런 권리를 얻은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은 신적인 요소의 한 부분으로 인정된 것이고 일시적인 것에 의해 더 이상 영향 받지 않는다. 그리하여 일시적 상태를 지배하는 법칙의 지식을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카르마의 법칙을 알고 싶은 그대여, 먼저 카르마의 법칙으로부터 자유롭고자 노력해 보라. 이것은 당신이 이런 법칙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주의를 집중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로그인

접속자집계

오늘
3,167
어제
5,996
최대
5,996
전체
1,143,776

그누보드5
Copyright © woojunamu.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