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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학 (블라바츠키, 포웰)

멘탈체 [멘탈체] 14.기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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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주나무 댓글 0건 조회 4,350회 작성일 16-07-31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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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 장 

기능들 




멘탈체는 아스트럴체처럼 시간이 경과하면 각성되어 활동이 활발해져서, 멘탈계의 질료의 진동들에 반응할 것이고 이리하여, 전적으로 새롭고 훨씬 더 광범위한 지식과 능력의 세계를 자아 앞에 열어놓는다. 

그러나 멘탈체에서 의식이 완전히 발달한 것은, 단순히 멘탈체를 어느 정도 사용하는 것을 배우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사람은 생각할 때마다 그의 멘탈체를 사용하지만, 그것은 의식이 충분히 표현될 수 있는 하나의 독립된 체로서 멘탈체를 활용할 수 있는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우리가 앞에서 본 것처럼 일반인의 멘탈체는 그의 아스트럴체 보다 훨씬 덜 진화 되어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멘탈체의 상위부분들은, 하위부분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을 때도 아직까지 깊이 잠들어 있다(전혀 각성되어있지 않다). 사실, 일반인의 멘탈체는 진정한 의미에서는 하나의 체體가 아니다. 왜냐하면 일반인은 멘탈체로서 이리저리 여행할 수 없고 또한 정상적인 방법으로 인상印象들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멘탈체의 (수용) 감각들을 사용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현대 과학자들 중에서는, 비록 멘탈체가 아주 고도로 발달된 경우도 있겠지만, 이것은 주로 각성된 의식waking consciousness에서 사용되고, 아직 까지는 상위계에서 직접적으로 인상들을 받아들이는 데는 매우 불완전하다. 

사실, “위대한 비전가들의 형제단The Great Brotherhood of Initiates”에 속하는 스승들에 의해 명확히 훈련을 받아온 사람을 제외하고는, 의식적으로 멘탈체로 활동하는 사람은 너무나도 드물다.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수년 동안 명상을 하고 특별히 노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 1 비전 때까지, 사람은 아스트럴체로 밤에 일을 한다. 그러나 아스트럴체가 완벽히 통제되고 그가 아스트랄체를 충분히 사용할 수 있게 되자마자, 멘탈체로 일하는 것이 시작된다. 멘탈체가 완전히 조직을 갖추게될 때는 아스트럴체 보다 훨씬 더 유연한 체가 되고, 아스트럴계에서 불가능한 것이 멘탈체로 많이 달성할 수 있다 

멘탈계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능력은, 제 2비전이 하위 멘탈계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제 2비전을 바라는 비전가가 성취해야한다. 

아스트럴계의 시력이 물질계의 시력과는 전혀 다른 것처럼, 멘탈계의 시력은 아스트럴계나 물질계의 시력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멘탈적인 시력의 경우에는, 우리는 더 이상 보는 것과 듣는 것과 같은 별도의 감각들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멘탈체에 도달하는 진동들에 충분히 반응을 하여, 어떤 대상이 멘탈체의 인식 범위내에 올 때 멘탈체가 즉시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게된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한다. 말하자면 멘탈체는 그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한번의 순간적인 작용에 의하여,―적어도 멘탈계와 하위계들에 관한 한―그것에 관하여 알아야할 모든 것 즉 그것의 원인과 결과들 및 가능성들을 알아버리는 (멘탈체 전체에 걸친) 하나의 일체화된 감각을 가정해야한다. 고차원적인 감각이 이렇게 작용하게 되면, 어떠한 의심, 주저함이나 지체도 결코 있을 수 없다. 만일 그가 어떤 장소를 생각하면, 그는 이미 거기에 가 있게 된다. 어떤 친구를 생각하면, 그 친구가 그 앞에 와 있다. 더 이상 오해들이 생길 수 없고 또한 더 이상 외모에 속거나 현혹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친구의 모든 상념과 감정은 멘탈계에서 한 권의 책처럼 그 앞에서 적나라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고차원적인 감각이 개발된 친구와 함께 있다면, 그들의 교제는 모든 세속적인 개념을 벗어난 완벽한 상태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거리와 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감정들은 더 이상 숨길 수가 없고, (또한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표현되는 어색한 말들에 의하여 적어도 절반이라도 나타난다; 질문과 대답은 필요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상념영상(thought-pictures)들은 형성되자마자 읽혀지고, 생각들의 상호교환은 섬광이 마음속에 스쳐지나 가는 것처럼 빨리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놀라운 기능은 현재 우리가 마음대로 구사하는 기능들과는 단지 정도에 있어서만 차이가 나지, 종류가 다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물질계에서처럼, 멘탈계에서도 인상들은 보이는(지각되는) 대상으로부터 보는 사람에게로 이동하는 진동들에 의하여 여전히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 상태는 붓디계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 다루지 않는다. 

멘탈 투시에 관하여 언급할만 하거나 언급해야할 것은 별로 많지 않다. 왜냐하면 최고의 신비학파 중 몇몇 단체에서 적절히 훈련받은 제자들을 제외하고는, 그 예를 찾아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멘탈 투시는 우리가 최고로 영광스럽고 장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평범한 일상생활처럼 존재하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 

멘탈 투시로 가능한 모든 것―적어도 그가 동화시킬 수 있는 것 모두―은 훈련된 제자의 능력은 미칠 수 있으나, 훈련을 받지 못한 투시가가 그에 이를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아마도 일반 투시가들 중에서는 천명 중 한 명도 결코 그 정도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 피술자가 시술자의 통제에서 벗어났을 때, 메스메리즘적인 트랜스 상태에 있을 때, 그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일어나는 일은 아주 드물다. 왜냐하면 그것은 피술자와 시술자 양쪽에서 고매한 영적인 열망, 상념 및 의도의 순수함에 관해서는 거의 초인적인 자격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경우들에서 조차도, 피술자는 일반적으로 강렬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자기의 개인적인 종교적 확신들이 깊이 배어든―지극한 축복에 대해서 희미한 추억 이상을 가져오는 일은 좀처럼 없다. 

모든 지식, 즉 멘탈계를 초월하지(벗어나지) 않는 모든 지식은 멘탈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이용가능 할 뿐만 아니라, 과거 세상의 일은 현재 만큼이나 개방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연(세계)에 대한 지울 수 없는 기억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제 28장을 보라.) 

이리하여, 예를 들면, 멘탈체를 자유로이 작용시킬 수 있는 사람에게는, 책을 읽는 과정과는 아주 별도의 방법으로서 책의 의미를 이해하고 파악하는 방법들이 있다. 가장 단순한 방법은 책을 연구해온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그 내용을 읽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그가 단지 그 연구가가 포착한 개념에만 접근하게 된다는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두 번째는 책의 오오라를 조사하는 것이다. 각각의 책은 그 책을 읽고 연구해온 모든 사람들의 상념들에 의해서 형성된 상념 오오라로 둘러싸여 있다. 이리하여 책의 오오라를 조사함―psychometrisation―으로써, 일반적으로 그 내용을 거의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물론, 비록 다양한 독자들이 품고 있지만 책 자체에서는 표현되어 있지 않은, 사변적인 견해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제 8장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오늘 날에는 옛날 사람들 만큼 사려 깊고 철저하게 연구하는 독자들이 거의 없는 것 같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현시대에 발행되는 책과 관련된 상념체(상념형태)들은 과거에 출간된 저자의 필사본들을 둘러싸는 상념체들만큼은 좀처럼 정확하고 명확하지가 않다. 

세 번째 방법은 제 10장에서 설명한 것처럼, 책이나 필사본을 완전히 넘어가서 저자의 마음에 접촉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고도의 능력들을 필요로 하는 네 번째 방법은, 책의 주제를 심령적으로 탐흔하고 그 주제에 관한 모든 상념 흐름이 한 점에 모이는 그 주제의 상념센터를 멘탈적으로 방문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제 12장 상념센터들에서 다루었다. 

멘탈계에서 관찰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람이 잠시 동안 아주 조심스럽게 그의 상념을 중단시켜, 상념의 창조물들에 의해서 인상을 쉽게 받는 주위의 질료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자신에 관련된 여건들을 전적으로 이렇게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마음을 정지 상태로 유지하는 것은, 마음을 텅 비게 하는 것blankness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하타요가 수행의 상당히 많은 부분이 그것을 성취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후자의 경우엔, 마음(의 작용)은 점차로 둔화되어 절대적인 수용성의 상태로 되고, 그 상태는 거의 영매의 상태mediumship에 접근하게된다. 전자의 경우에, 마음은 가능한 예리하게 깨어있고 적극적이며, 단지 마음이 관찰하고자하는 대상속으로 개인적인 견해가 개입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마음의 상념(작용)을 잠시 중단시키는 것이다. 

다른 모든 체들속에서처럼 챠크람들, 즉 힘의 센터들은 멘탈체에서도 존재한다. 그들은 힘이 하나의 체體로부터 다른 체體로 흐르는 연결점들이다. 에텔체의 챠크람들은 “에텔체”에 설명되어 있으며, 아스트럴체의 차크람들은 “아스트럴체”에 설명되어 있다. 현재 멘탈체의 챠크람들에 관하여 이용가능한 정보는 너무나 빈약하다. 

그에 대한 한 가지 정보는 다음과 같다: 어떤 유형의 사람에게는 머리 정상에 있는 챠크람은 구부러져 있거나 경사져 있어 그 (센터의 힘의) 소용돌이는 소위 송과선으로 알려져 있는 퇴화된 기관과 일치한다. 그리고 송과선은 이러한 사람들에 의하여 활성화되어서, 정상적인 방식으로는 거치게 되는 중간의 아스트럴체를 (명백히) 전혀 거치지 않고 하위 멘탈계와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길이 된다. 블라바츠키 여사가 송과선의 각성에 대하여 상당히 강조를 할 때, 그녀가 글을 쓴 대상은 바로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또 다른 사실은, 힌두인들이 아니마라 부르는 확대 기능인데, 눈썹사이에 있는 챠크람이 이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 챠크람의 중앙에서부터 연장된, 일종의 렌즈에 해당하는 단 하나의 원자原子가 있어 관찰할 미세한 대상들의 크기에 맞는―소위 소형 현미경과 같은―기관器官이 돌출되어 있다. 

사용되는 그 원자는 물질적이거나 아스트럴적이거나 멘탈적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어느 것에 속하든 지간에 특별한 준비 과정을 필요로 한다. 원자의 모든 스파릴래는 현재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혹성 연쇄의 제 7활동기에 꼭 맞도록 열려져야만 하고 완벽하게 작용해야만 한다. 

그에 사용되는 힘power―배율倍率―은 원인체原因體에 속하므로, 하위계의 원자가 접안接眼렌즈처럼 사용된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상물들을 반사하는 체계가 먼저 이해되어야한다. 

원자는 어떠한 하위계에서도 자체조정이 가능하므로, 조사되고 있는 대상에 필요한 어떠한 배율로도 맞출 수 있다. 

렌즈의 배율이 더욱 확대되면 조작자는 렌즈로 그의 의식을 집중하여 그의 의식을 먼 지점까지 투사할 수 있게 된다. 

바로 그 힘은, 다르게 조작함으로써, 너무나 커서 보통의 시야로서 즉시 볼 수 없는 것을 전체적으로 보기를 원할 때, 여러 가지 배율로 축소시키기 위하여 사용될 수도 있다. 이것은 힌두인들에게 마히마로 알려져있다. 

멘탈계 자체의 한계를 벗어나는데 있어서 공간적인 한계가 멘탈 투시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제 27장에서 살펴보겠지만, 그것은 다른 혹성들의 멘탈계로까지 확장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멘탈 투시에 의하여 아주 많은 정보를 얻는 것이 가능하다. 

지구대기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상념의) 교란상태를 벗어남으로써, 시력을 굉장히 명확하게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다. 엄청나게 배율을 높이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또한 어렵지 않다. 그 고배율로 다른 혹성들에 관한 아주 흥미로운 천문학적인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 

프라나 혹은 생명력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계에서처럼, 멘탈계에서도 또한 존재한다. 쿤달리니 또는 뱀의 형상을 한 불과, 포하트 즉 전기와, “에텔체”에서 원초적인 힘Primary Force로서 언급된 생명력life-force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멘탈계에 있는 프라나와 쿤달리니에 관하여는, 현재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쿤달리니가 여러 가지의 모든 체들을 활성화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위에서 언급된 원초적인 힘은 제 2로고스로부터 하강한 두 번째 분출의 다양한 표현들 중 하나이다. 부디계에서 그것은 인간에 내재하는 그리스도―원리로서 현현해 있다. 멘탈체와 아스트럴체에서 그것은 다양한 층의 질료를 활성화시키는데, 아스트럴체의 상위부분에서는 고상한 감정으로서 나타나고 아스트럴체의 하위부분에서는 아스트럴체의 질료에 힘을 제공하는 단순히 (물밀듯이) 쇄도하는 생명력으로서 나타난다. 최하위의 (육체에서) 현현할 때 그것은 (옷 입듯이) 에텔질료를 입고서, 아스트럴체로부터 에텔체의 표면에 있는―인간의 몸 내부로부터 솟아오르는 쿤달리니와 만나게 되는―챠크람속으로 달려간다. 

신비학도는 보라색 프라나의 흐름이 고차원의 영적인 상념과 감정을 자극하고 일반적인 상념은 노란 색이 일부 뒤섞인 푸른색의 흐름이 작용함으로써 자극된다는 것과, 또한 몇몇 종류의 심각한 정신 박약의 경우에는 노랗고 푸른 보라색을 띤 생명력이 뇌로 흐르는 것이 거의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주교 리더비터가 지은 ‘챠크라(The Chakras)’는 챠크라들에 관하여 그리고, 특히 다양한 센터들 혹은 챠크라들과 계들 사이의 관련성에 관한 귀중한 정보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신비학도는 아래의 표들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챠크람에 관한 표 

(표 생략) 

위의 표에서 보면, 원초적인 힘과 프라나와 쿤달리니는 인간의 멘탈체와 감정적인 삶에 직접 관련이 없고 단지 그의 신체에만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챠크라들에 들어오는―신비적이고 영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다른 힘들이 또한 존재한다. 미저골과 비장 챠크람은 이러한 힘들을 전혀 나타내지 않지만, 배꼽 차크람과 그 이상의 챠크람들은 인간의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힘들이 들어오는 입구들이다. 

여러 챠크람들 속으로 흘러들어오는 프라나 흐름들이 띠는 색채들과 ‘비교(Secret Doctrine)’ 제 3권 p.452의 도해속에서 블라바츠키 여사에 의하여 인간의 본질들principles에 배정된 색채들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아래의 표에 나타나 있다. 

(표 생략) 


쿤달리니는 제 3로고스에서 나오는 첫 번째 분출에 속한다. 그것은 지구의 중심부에 있는 하나의 거대한 구球에 작용하는데, 단지 그 바깥층들에만 접근할 수 있다; 이 바깥층들은 인간의 몸에 있는 쿤달리니의 여러 층들과 공명진동하는 관계에 있다. 이리하여 인체 내에 있는 쿤달리니는 지구 내부의 깊숙한 곳에 있는 이른바 “성령의 산실”로부터 오게 된다. 그것은 지하 세계의 불에 속하는데, 프라나 혹은 생명력의 불과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프라나는 공기 및 빛과 활짝 트인 (광활한) 공간들에 속하는 것이며,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불은 벌겋게 단 쇠의 불처럼 훨씬 더 물질적이다. 이 엄청난 힘에는 다소 무시무시한 측면이 있다; 그것은 물질 속으로 점점 더 깊이 하강하여, 완만하지만 어쩔 수 없이 계속 나아가는 느낌을 주는 것은 떨칠 수가 없다. 

쿤달리니는 첫 번째 분출이 근원으로 돌아가는 중에 표출되는 힘이며, 그것은 이미 말한 원초적인 힘과 긴밀히 접촉하면서 작용하여, 진화하고 있는 피조물이 제 1 로고스의 분출을 받아 인간적인 자아가 될 수 있는 정도까지 그 두 가지 힘이 피조물을 끌어올리게(데려오게) 된다. 

시기상조로 쿤달리니가 각성되면, 불쾌한 일들이 많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쿤달리니가 각성된 사람의 본성에 있는 모든 특성을 강화시키고, 좋은 특성들보다 저급하고 악한 특성들을 더 쉽게 강화시킨다. 예를 들어, 멘탈체에서는 야심이 아주 쉽게 각성되고, 곧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커진다. 지성적인 힘을 아주 강화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그와 동시에 일반인에게서는 전혀 생각할 수도 없는 그러한 비정상적이고 악마나 가질 수 있는 자만심을 유발시킬 것이다. (쿤달리니에 대한) 가르침을 받지 않은 사람은 결코 누구도 쿤달리니를 각성시키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만일 그러한 사람이 쿤달리니가 우연히 각성되었다는 것을 발견하면, 즉시 이러한 문제들을 충분히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조언을 구해야한다. ‘하타요가 프라디피카’ Ⅲ권 p.107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쿤달리니는 요기들에게 자유를,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속박을 준다.” 

쿤달리니의 정복은 매번 화신할 때마다 반복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화신할 때마다 입게 되는 체들이 매번 새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쿤달리니가 완전히 정복된 후에는, 반복해서 정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쿤달리니의 작용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은 상위의 자아의 목소리를 듣는 것 보다 오히려 그 자아를 볼 것이다. 또, 이 상위의 자아와의 연결에는 많은 단계가 있다; 개성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자아ego의 영향을 의미하지만, 자아의 관점에서 보면 모나드의 힘을 의미하고, 모나드의 관점에서 보면 로고스의 의식적인 표현(수단)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멘탈체의 여러 기능들을 사용하기 위하여, 의식을 멘탈체에서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의 의식은, 비록 자신이 막연하게 다른 체들을 통하여 (여러 가지 차원과 공간과 대상을) 의식할 수도 있지만, 한번에 단지 하나의 체에만 집중될 수 있다. 이리하여, 만일 아스트럴 및 멘탈 시력을 소유한 사람이 그의 의식을 육체의 두뇌에서 (외부 대상을) 집중하면, 그는 친구들의 신체들을 완벽하게 볼 수 있는 동시에 그들의 아스트럴체 및 멘탈체도 희미하게나마 볼 것이다. 지극히 짧은 순간에, 그는 의식의 초점을 바꾸어, 아스트럴체를 충분히 그리고 완벽하게 볼 수 있다; 그러한 경우에, 그는 멘탈체 및 아스트럴체를 계속 보겠지만, 아주 자세히는 보지 못한다. 똑같은 사실이 멘탈 시력과 상위계들의 시력에도 적용된다. 

멘탈계에서 본 것을 육체의 두뇌에 가져올 때, 상위계로부터 하위계로의 이중전이(二重轉移)라는 어려운 작용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멘탈계에서 본 것에 대한 기억은 중간의 아스트럴계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멘탈체의 기능들이 육체에 각성되어 있어 사용할 수 있을 때조차도, 물질계의 언어로 자신이 (멘탈체로) 보는 것을 전혀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멘탈체의 의식을 육체의 두뇌 속으로 가져오기 위해서는, 여러 체들 사이의 연결(고리)들이 형성되어야만 한다. 처음에는, 이러한 연결들이란 그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이루어져 있으며, 활발하게 활성화되어있지 않아서, 사용함으로써 발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소위 발육 부진의 신체 기관들과 같은 상태에 있다. 그러한 연결 고리는 육체 및 에텔체를 아스트럴체와 연결하고, 아스트럴체를 멘탈체와 연결하고 멘탈체를 원인체와 연결한다. 의지의 작용이 그 연결 고리들을 활성화시키고, 그들이 작용하기 시작할 때 그 사람은 의식을 한쪽 체體로부터 다른 체體로 전달하기 위하여 그들을 사용한다. 의지의 사용은 연결 고리들을 활성화시키면서 쿤달리니, 즉 뱀의 형상을 한 불을 자유롭게 한다. 

육체와 아스트럴체의 연결 고리는 뇌하수체이며, 육체와 멘탈체의 연결 고리는 송과선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어떤 사람들은 뇌하수체를 먼저 개발하고 어떤 사람들은 송과선을 먼저 개발하는데, 각자가 자신의 구루, 즉 영적인 스승이 지시하는 방법을 따라야만 한다. 

사람이 자신의 여러 체들 사이의 연결부를 개발한 후에 각성된 의식상태로 육체를 떠나는 것을 배웠을 때, 그는 물론 지금까지는 그냥 살아왔었던 육체적 삶과 수면중의 삶 사이의 (무의식이 차지하는) 공백을 메우게 된다. 이 공백을 메우는 것은 멘탈체로부터 오는 진동들에 반응할 수 있도록 두뇌를 훈련함으로써 더욱 촉진된다. 그때에는 뇌가 더욱더 그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잘 듣는 도구가 되어, 의지로부터 오는 자극들을 받아 활동들을 수행하고 의지가 약간만 작용해도 반응하게 된다. 

육체에서 상위 의식의 진동들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주로 준비해야 할 준비 사항들은 대개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정갈한 음식과 순수한 삶을 영위함으로써 하위의 여러 체들을 정화시키고, 정과 욕심을 완전히 정복하고, 외부적인 삶의 소란과 우여곡절에 영향을 받지 않는 평온하고 균형을 이룬 성격과 마음을 함양하고, 고상한 주제들에 관한 고요한 명상 습관을 기르고, 특히 뇌로 하여금 한가지 일로부터 다른 것으로 정신없이 왔다갔다하게 하여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게 하는 쉽게 흥분하는 성급한 마음을 지양하고, 상위계의 모든 것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으로 참으로 사랑하는 친구와의 관계에서처럼 그 모든 것과의 관계에서 마음이 만족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사람이 일반적으로 각성된 의식상태에서 멘탈체의 기능들을 사용할 수 있을 때에, 그는 물론 멘탈계로부터 오는 모든 형태의 인상들을 받을 수 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의 모든 활동들은, 그가 바로 그들의 신체 움직임 들을 볼 때처럼, 그에 의해서 감지된다. 멘탈체의 능력들을 사용하는 것을 배울 때, 사람은 하위의 체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들을 상실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상위체들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 단계에서 사람은 또한 의식적으로 상념형태를 창조하고 통제함으로써 그의 유용한 능력들을 매우 크게 증대시킬 수가 있다. 왜냐하면 현재 자신이 멘탈체로 여행하는 것이 불편할지도 모르는 장소들에서 일을 하기 위해서 그 상념형태를 사용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념형태들이 작용할 때 그 상념들을 지켜보며 인도하고 그의 의지를 이행하는 대리인들로 되게 하면서, 멀리서부터 그 상념들을 그는 통제하게 된다. 

사람이 신비 지혜의 가르침을 따라 나아가기 시작할 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의 전 멘탈체는 정화되어 완전히 조화롭게 작용하는 상태에 있어야한다. 특히, 그는 강하고 명확한 상념 형태들을 만드는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 게다가, 그가 상념 형태들을 생생하게 심상화할 수 있다면 그에게 큰 도움과 위안이 된다. 

그 두 가지 행위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상념의 형성은 멘탈체를 통하여 활동하는 의지의 직접적인 작용이다. 반면에, 심상화는 자신이 만든 상념형태를 투시적으로 보는 능력일 뿐이다. 만일 사람이 어떠한 대상을 강하게 생각하면, 그가 그것을 심상화하든 하지 않든 간에, 그 대상의 영상은 생각하는 것 바로 그 만큼 그의 멘탈체내에 있게 된다. 

또한 신비학도는 고도의 도덕적 순수성과 멘탈적인 균형을 유지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이 없으면 투시는 투시가에게 저주가 되고 축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멘탈체의 의식을 개발하면, 매번 화신하여 사는 전 생애동안에 그의 삶과 기억은 연속적으로 유지된다. 

이리하여 사람이 멘탈체의 능력들과 한계들을 경험하면서 멘탈체로 의식적으로 작용할 수 있을 때, 그는 자기가 사용하고 있는 체와 자기 자신을 구별하는 것을 또한 필연적으로 배우게 된다. 그 다음 단계는 그가 개성적인 “나” 즉 멘탈체의 “나”의 환영적인 성격을 지각하고, 자기 자신을 실제적인 사람 즉 원인체에 살고 있는 개체성(individuality) 혹은 자아(ego)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의식을 상위 멘탈계에 있는 자아(ego)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이 단계에서는, 그는 그의 모든 과거 생애들에 대한 기억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가 멘탈계와 아스트럴계 사이의 장벽을 무너뜨려 기억을 연속적으로 유지하는 즐거움을 맛보고자 한다면, 그의 멘탈체를 하나의 체로써 사용하는데 자신을 오랫동안 철저하게 훈련해야만 한다. (자아의 존재에 대한 지식이 육체적인 의식에 오기 오래 전에, 자아가 자신의 계에서 충분히 의식적이었으며 활발히 작용하였던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우리는 유추해보면 알게 된다. ) 

멘탈체 자체는 피로를 느낄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마음에는 피로와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이 피로하다는 것은 단지 마음이 스스로를 표현하게 되는 수단인 육체의 두뇌가 느끼는 피로일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육체적인 피로는 멘탈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리하여 완전히 지친 사람은 (육체를 통일적으로) 조정하는 능력을 상당히 상실하게 된다. 모든 육체의 세포가 불평을(부조화를 유발) 하고 있으며, 모든 체들―에텔체, 아스트럴체, 멘탈체―에게 이러한 영향을 주어, 자그마한 별도의 소용돌이들이 아주 많이 형성되어 각자가 자신의 진동율로 진동하여, 모든 체들이 가지고 있는 응집력과 제각기 체가 맡은 바 일을 수행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현재의 지식수준에서는, 일반적인 기억이 작용하는 정확한 방식은―그 주제가 조사되지 않았기 때문에―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다. 그러나, 멘탈체의 진동은 기억이 작용하는 방식의 일부이며, 원인체는 그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수 천년 전에는 상위의 체들의 기능들을 개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어떤 의식이 존재했던 것 같다. 의식의 집행자가 어두운 방에서 “옴Om”이라고 발성하여 자신과, 그의 마음에 가득한 감정들을 참석한 모든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게 했다. “브우르Bhur"를 발성할 때, 어두운 방은 (불이 환하게 켜진 것처럼) 빛으로 가득차는 것을 그들은 느끼게 된다. 다른 단어를 발성하면, 아스트럴시력이 그들에게 일시적으로 열리고, 또 다른 단어를 발성하면 그들의 멘탈 시력이 비슷하게 열렸다. 그러한 효과들은 비록 일시적이지만, 장래에는 똑같은 결과를 얻는 것이 물론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더 쉽게 될 것이다. 

신비학도가 충동과 직관을 구별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중요하다. 둘 다가 내부로부터 두뇌에 오기 때문에, 처음에는 둘이 정확히 똑같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 여건이 허락되면, 잠시 동안 기다리는 것이 지혜롭다. 왜냐하면 충동은 시간이 지나면 대개 점점 약해지지만 직관은 그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충동은 대개 흥분이 따르고, 충동에는 개성個性적인 것이 있다: 반면에 참된 직관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명백하지만, 조용한 가운데서 느껴지는 강렬한 힘을 띠고 있다. 충동은 아스트럴체가 (고양되어 오는 것을) 육체가 느끼는 것이며, 직관은 자아로부터 개성에 새겨진 단편적인 지식이므로 상위 멘탈계나 심지어 때때로는 부디계로부터 온다. 

충동과 직관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본성이 충분히 균형을 이룰 때까지, 조용히 심사 숙고하는 것이 필요하고,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기다려보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러한 상황하에서 충동은 사라져버리는 반면에, 직관은 점차로 더 명확해지고 점점 더 강해진다. 고요함과 차분함은 하위의 마음으로 하여금 더욱더 분명히 직관을 듣고 그 능력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이리하여 직관은 고요하게 기다리면 아무것도 잃지 않고 오히려 이득을 얻게 된다. 

더군다나, 직관은 이기심이 없는 것과 항상 연결되어 있다. 만약 상위의 계로부터 오는 어떤 자극에 이기심이 약간이라도 나타나 있다면, 그것은 아스트럴적인 충동이지 참된 부디적인 직관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보면서 알게 되는) 물질계의 직접적인 시력과 약간 유사한 직관은, 결국에는 물질계의 촉감에 비유될 수 있는 이성을 대신할 것이다. 시력이 촉감의 상태에서 발달하는 것과 똑같이, 연속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본질적인 성격은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직관은 발달한다. 

그러나 지성이 없는 사람들의 직관은 충동이며, 욕망에서 기인하며, 사유보다 더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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