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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학 (블라바츠키, 포웰)

멘탈체 [멘탈체] 16.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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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주나무 댓글 0건 조회 4,160회 작성일 16-07-31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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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 장 

명 상
 



집중은 물론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집중은 주인이 뜻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마음을 하나의 도구로 만든다. (본질인 생명을 가리고 있는) 휘장―형상―을 뚫고 들어가 생명에 이르러 그 (상위의) 생명을 끌어당겨 마음이 속하는 (하위의) 생명과 연합시킬 목적으로, 집중된 마음이 어떠한 대상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향할 때―그때 명상이 이루어진 상태다. 이리하여 집중은 기관(器官)을 형성하는 것이며 명상은 그 기관의 작용이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집중이란 마음을―종잡을 수 없이, 외부의 대상들이나 감각작용이나 또는 마음 자체의 작용에 의해 생긴 산만한 것들에 전혀 끌려가지 않고―단 하나의 점에 확고하게 고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은 (고정된 것에서) 벗어나지 않을 정도의 지속성과 부동의 상태에 이르기까지 유지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마음은 서서히 외부세계와 신체로부터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을 배우게 되어, 감각들이 매우 조용한 상태로 있지만 마음은 강하게 살아있고 마음의 모든 에너지들이 내부로 철수되어, 마음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상태인 단 하나의 (점에 해당하는) 생각에만 그 에너지가 집중되게 된다. 마음이 비교적 쉽게 자신을 이러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을 때 한 단계 더 나아갈 수가 있으며, 강한 가운데서 조용하게 의지적인 노력을 기울임으로써―물질 두뇌에서 작용하는 동안에 도달할 수 있는―최고의 사고작용(thought)까지도 마음은 벗어날 수 있고, 그렇게 노력하는 중에 보다 상위의 의식에 올라가 그 의식과 하나가 되어, 육체로부터 자유로운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리하여 마음이 산만하지 않고 주의(관심)를 기울여서 잠시동안 하나의 주제에 관하여 지속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명상을 시작할 준비가 된 것이다. 

우리는 명상을 헌신의 대상이나, 이해하기 위해 (지혜 혹은 지성의) 빛이 비침(illumination)을 필요로 하는 문제나, 형상이기 보다는 사실상 (본질적인) 생명을 깨닫고 흡수할 수 있는 대상에다 집중된 마음을 주의 깊게 계속 유지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것은 다양한 방향과 관계 속에서 하나의 주제를 고찰하거나 숙고하는 기술이다. 

명상에 대하여 정의를 다르게 내리면, 명상이란 각성된 의식, 즉 정상적인 상태로 작용하는 마음속으로 초의식(super-consciousness)에 대한 자각(깨달음)을 가져오고자 하는 노력, 다시 말하면 신성한 본질 혹은 영적인 본질―참된 인간―의 영향력이 하위 인성(人性)에 미칠 수 있는 하나의 채널을 열망함으로써 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과 감정들로부터 벗어나 이상(ideal)으로 이르는 것이며, (암흑에) 속박된 하위 의식의 문을 열어 이상의 영향을 받게 하는 것이다. 블라바츠키 여사는 “명상이란 내적인 인간이 무한에 대해 느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갈망이다”라고 말했다. 성(聖) Alphonus de'Liguori는 명상을 “영혼이 신의 사랑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는 축복된 용광로”라고 말했다. 

(명상의 주제로) 선정된 이상은 미덕과 같이 추상적일 수도 있고, 사람속에 내재하는 신성일 수도 있고, 인간적인 모습을 한 매스터나 신성한 스승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가 본질적으로는 영혼을 신성한 근원으로 고양하는 것 즉, 개개의 자아가 우주적인 자아와 하나가 되고자하는 갈망이다. 

음식이 물질적 생명에 대한 관계는, 명상이 영적인 생명에 대한 관계와 똑같다. 명상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단연코 가장 유능한 사람이다. 로즈베리Rosebery 경은 크롬웰에 대해 말할 때, 그를 “실용주의적인 신비가”로 묘사하고, 실용주의적인 신비가는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이다라고 선언했다. 집중된 지성 즉 소란스러운 상태에서 벗어나는 능력은, 일을 하는데 있어서 에너지가 엄청나게 집중되는 것과, 보다 꾸준함과, 자기 절제와, 차분함을 의미한다. 명상하는 사람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힘을 (분산하여) 허비하지 않으며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은 여러 가지 사건들을 지배한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사건들이란 (내부적으로 존재하는) 힘이 단순히 외부적으로 표현되는 것에 불과한데, 사건의 근원인 힘이 그의 내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가 신성한 생명을 공유하므로, 따라서 신성한 힘도 행사할 수 있다.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마음이 하나의 이미지에 맞게 형성되어 있고 ‘아는 자’가 꾸준히 그것을 응시(관조)한다면, 이를 통하여 어떠한 말로 설명하는 것 보다 대상에 대해 훨씬 더 완벽한 지식을 얻게 된다. 집중을 행할 때, 그림(영상)이 멘탈체 안에서 형성되는데, 가령 말로서 설명된 것으로부터 대략적으로 얻은 윤곽에 대해 집중을 하게 되면 더욱 더 세부적으로 완벽하게 살을 붙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의식은 ‘말로써 설명된’ 바로 그 대상들과 더욱 긴밀하게 접촉하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들이 명상을 권장하고, 명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모든 철학의 학파들이 인정해왔다. 몸이 튼튼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근육을 발달시키기 위하여 정해진 운동을 행하는 것처럼, 신비학도는 자신의 아스트럴체와 멘탈체를 발달시키기 위하여 특정한 수련들을 행해야 한다. 

물론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는 것과 같이, 명상의 종류도 다양하다; 하나의 명상법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좋은 결과들을 주기란 전혀 불가능하다. 각 사람은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형태의 명상을 독자적으로 찾아야한다. 

명상은 많은 목적이 있는데, 주된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사람이 고상하고 거룩한 것들을 생각하여, 자기의 상념이 반복되는 보잘 것 없는 일상생활의 일로부터, 즉 시시한 일들과 골치 아픈 일로부터 확실히 벗어나도록 한다. 

(2) 사람으로 하여금 그러한 고상하고 거룩한 것들을 생각하는데 익숙하게 하여, (잠시 후에는) 그것들이 일상생활의 배경을 형성하게 된다. 당장 필요로 하는 일상적인 일들로부터 해방될 때 마음이 즐겁게 그 배경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3) 일종의 아스트럴 및 멘탈적인 체육(gymnastics)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상위의 체들을 건강하게 보전하고 신성한 생명의 흐름이 그들을 통하여 계속 흐르도록 한다. 이를 위하여, 규칙적으로 명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4) 인격을 도야하여, 그 안에 다양한 특성들과 미덕들을 함양시키는데 사용될 수 있다. 

(5) 보다 고상하고 보다 정묘한 것들을 포함하기 위하여 의식을 상위계들로 고양시킨다; 이를 통하여 사람은 신의 면전에까지 오를 수 있다. 

(6) 자연의 신비를 풀고 또한 상위의 계들로부터 축복들을 불러 내린다. 

(7) 처음에는 비록 서툴지라도, 더욱 깊이 발전하여 더욱 폭넓은 지식을 얻어, 투시 능력을 달성하고 마침내 이 물질계를 완전히 벗어나는 보다 차원 높은 삶에 이르는 길이다. 

명상은 상위의 의식을 개발하는 가장 쉽고도 안전한 방법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가령 로고스나 매스터에 관하여 명상함으로써 시간이 경과하면 누구라도 자기 자신(의 의식)을 먼저는 아스트럴계로 그 다음에 멘탈계로 고양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물론, 그 시간이 얼마나 오랫동안 걸릴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학도가 살아온 과거(생)와 그가 현재 행하는 노력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고차원적인 것들을 진지하게 연구하는데 열중하고 있는 사람은, 잠시동안 자기 자신(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멘탈계에서 강력한 상념형태를 만든다. 이 상념 형태는 즉각적으로 바로 상위의 계에서 맴돌고 있는 힘에 의하여 하나의 채널로 사용된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러한 성격의 상념 속에서 함께 합쳐질 때, 그들이 만드는 채널은 각 채널의 단순한 합보다 그 수용 능력이 엄청나게 더 크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렇게 한 덩어리가 되면 그로 인해 형성되는 채널이 작용하는 공동체에는 더없이 귀중한 축복의 근원이 된다. 

그들이 지성적인 연구에 몰두할 때, 바로 그들이 정상적으로는 상위 멘탈계에 고유하게 머물고 있는 힘을 하위 멘탈계로 쏟아 붇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만약 그들의 상념이 보다 고상한 측면에서 윤리와 영혼의 발달을 다룬다면, 그들은―부디계의 힘이 멘탈계로 하강하게 되는―보다 고매한 상념의 채널이 될 수가 있다. 

이리하여 그들은 (상위의 계의) 힘이 고유한 계界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면, 그 힘의 작용을 전혀 느낄 수 없었던 많은 사람에게, 그 힘의 영향이 미치게 할 수 있다. 

사실상 이것이, 예를 들면, 신지학회 지부의 실제적이고 가장 큰 기능 즉 신성한 생명을 분배하기 위한 하나의 채널을 제공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지학회의 모든 지부는 지혜의 매스터들과 그들의 제자들에게 관심의 초점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신지학회의 회원들이 연구와 토의 등을 할 때 그들의 상념들이 매스터들의 관심을 끌게 되어, 회원들 자신들로부터 나오는 어떤 것보다 훨씬 더 고상한 힘이 그때 (매스터에게서) 쏟아져 들어 올 수 있다. 

신지학회의 회원들은, 어떤 사람이 신지학회에 가입할 때 그는 가느다란 ‘생명의 실’로 매스터들과 연결된다고 매스터가 말씀한 것을 애니 베산트 여사가 언급한 것이 기억날 것이다. 이 실은 매스터와 (진동적으로) 일치하는 자기선(磁氣線)이며 신지학도는 열심히 노력하고 헌신과 사심 없는 봉사를 함으로써 그 실을 강화하고 확대시켜 살아있는 광선으로 만들 수도 있다. 

훨씬 더 높은 근원으로부터 축복을 불러내는 것이 가능하다. 신성한 생명과 빛은 신이 창조한 모든 세계(체계)에 충만해있는데, 각 계界에서의 힘은 정상적으로는 그 고유한 계에 엄격히 제한되어있다. 그러나 특별한 채널이 마련되면, 그 힘은 하위계에 하강하여 비추게 된다. 

어떠한 상념이나 감정이라도, 이기적인 측면이 전혀 없을 때마다 그러한 채널은 항상 제공된다. 이기적인 감정은 폐쇄된 곡선으로 움직여서, 그 감정이 속하는 계에 그 반응이 (부메랑처럼 부정적으로) 되돌아온다. 전혀 사심이 없는 감정은 되돌아오지 않는 에너지의 분출이 되지만, 그 상승 운동 중에 바로 옆의 상위계로부터 신성한 능력이 하강하기 위한 통로를 제공한다. 이것이 바로 ‘기도 응답’이라는 보이지 않는 실상인 것이다. 

투시능력자에게 이 채널은 일종의 거대한 원통형이나 깔때기 모양의 소용돌이처럼 보인다. 이것은 물질계에서 (그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멋진 표현이지만 실제로는 부적절한 것이다. 왜냐하면 힘이 채널을 통하여 흘러 내려올 때, 그 힘은 어느 정도로 소용돌이와 하나가 되어, 그 소용돌이에 의해 영향을 받아 (그와 함께) 힘이 어떠한 통로를 통하여 왔는지를 보여주는 특징들을 띠면서, 그 소용돌이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명상을 함으로써 사람의 아스트럴체와 멘탈체는 점진적으로 혼란 상태에서 벗어나 질서 정연한 상태로 되어, 서서히 팽창하여 더욱더 높은 진동들에 반응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매번 노력할 때마다, 자신과 상위의 계와 직관적인 지식 사이를 분리시키는 베일의 막을 얇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의 상념 형태들은 날마다 더욱 명확하게 되어, 상위의 계로부터 그 속으로 쏟아 부어지는 생명은 더욱더 충만하게 된다. 

이리하여 명상은 보다 높은 유형의 질료들로 여러 체들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게 된다. 그것은 종종 고상한 감정들이 경험되도록 하는데 이 감정들은 부디계로부터 내려와서 아스트럴체에 반영된다. 게다가, ‘지속성’을 얻고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멘탈체와 원인체의 발달이 또한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을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영향을 주는 고상한 감정들은 조금씩 왜곡되기가 아주 쉬워서,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그에게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단지 감정만으로는 완벽한 균형이나 지속성을 결코 얻을 수 없다. 동기를 유발하는 감정의 힘뿐만 아니라 마음과 의지의 통제력도 필요로 한다. 

파탄잘리가 상세히 설명한 ‘다섯 가지 마음 상태’를 알면 명상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을 신비학도는 알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단계)가 멘탈계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각각의 계에도 그에 알맞은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1) 크쉬프타Kshipta: 나비와 같은 마음으로,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항상 쏜살같이 날아간다. 이것은 물질계에서의 활동성에 상응한다. 

(2) 무드하Mûdha: 혼란스러운 상태로, 사람이 감정의 지배를 받아 어찌할 바를 모르는 단계. 이것은 아스트럴계에서의 활동성에 상응한다. 

(3) 비크쉬프타Vikshipta: 어떤 개념에 심취해있거나 몰두한 상태로, 어떤 개념에 빠져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하위 멘탈계에서의 활동성에 상응한다. 이 상태에 있는 사람은 의식의 인식적인 측면과 관계있는 비베카를 배워야한다. 

(4) 에카그라타Ekâgrata: 한 점의 상태로 어떤 개념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개념을 소유하고 있다. 이것은 상위 멘탈계에서의 활동성에 상응한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은 의식의 활동성적인 측면과 관계있는 바이라기야(Vairâgya)를 배워야한다. 

(5) 니루다Niruddha: 자기 절제(self-control)의 단계로 모든 개념들을 초월하여 각성된 의지에 따라 그가 원하는 대로 선택한다. 이것은 부디계에서의 활동성에 상응한다. 이 단계의 사람은 의식의 의지적인 측면과 관계있는 샤트삼파티(Shatsampatti)를 배워야만 한다. 

완전한 통제력을 획득하여 마음의 모든 감정들을 억제할 수 있는 바로 그때, 그는 우리가 다음 장에서 더욱 충분히 다룰 관조(觀照)에 상응하는 삼마디(Samâdhi)에 들 준비가 되어 있다. 한편 마음의 단계에 대한 뼈대를 완전히 갖추기 위하여, 여기서 삼마디에 대하여 미리 약간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 

어원적으로 삼마디는 “완전히 함께 두는 것”을 의미하는데 영어로는 “마음을 함께 두는 것” 즉 마음을 완전히 함께 모으고 모든 산만한 것들을 억제하는 것으로 번역된다. “요가란 진정된 마음이다”라고 브야사(Vyâsa)는 말한다. 이것이 바로 삼마디의 원래 의미이다. 비록 마음이 완벽히 진정되어 고요한 상태(composure)에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결과인 ‘무아경’을 나타내기 위하여 더욱 빈번하게 사용되기는 하지만. 

두 종류의 삼마디가 있다: 

(1) 삼프라즈나타 삼마디: 의식이 있는 삼마디 즉 대상에 대하여 외부적으로 의식이 향한 삼마디. 

(2) 아삼프라즈나타 삼마디: 의식이 없는 삼마디 즉 의식이 내적으로 향하여 자신속으로 철수하여 근접한 상위의 체 속으로 들어간 삼마디. 

쉽게 참조할 수 있도록, 이 사실들은 아래의 표에 설명되어 있다. 

[도표 생략] 

학도는 또한 요가에서 언급되는 4가지 마음 상태에 대하여 간략하게 열거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1) 자그라트Jâgrat: 각성된 의식 
(2) 스바프나Svapna: 꿈의 의식 ― 아스트럴체에 작용하여 그 경험을 두 뇌에 줄 수 있는 의식 
(3) 수슈프티Sushupti: 깊은 잠의 의식 ― 멘탈체에서 작용하고 있으며 그 
경험을 육체의 두뇌에 인상을 줄 
수 없는 의식 
(4) 투리야Turîya: 무아경의 의식― 두뇌로부터 아주 많이 분리되어 있어 
서 외부 수단에 의하여 쉽사리 회상할 
수 없는 의식 

그러나 이들 네 가지 의식 상태가 각각 모든 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유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은 물질계 의식의 네 상태에 대한 예들을 보여주는데, 간결하고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표로서 정리되어 있다 

[도표 생략] 


또한, 그 용어들은 상대적이다라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이리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자그라트 즉 각성된 의식이란, 명백히 자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뇌와 신경계에 작용하고 있으며 이 의식은 전체의식의 한 부분이다. 우리는 의식을, 한쪽 끝만이 두뇌 속으로 삽입된 커다란 달걀 같은 빛(덩어리)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바로 그 끝이 각성된 의식인 것이다. 

그러나 자의식이 아스트럴계에서 개발되고 두뇌가 그 진동에 반응할 정도로 충분히 개발될 때, 아스트럴 의식은 각성된 의식의 일부분이 된다. 그때 멘탈 의식은 스바프나 즉 꿈의 의식이 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멘탈 자의식이 개발되고 (두뇌가) 그 (진동)에 반응할 때, 각성된 의식은 멘탈 의식을 포함한다. 그렇게 계속되다가, 마침내 다섯 개의 계界에 있는 모든 의식이 각성된 의식 속에 포함된다. 

이렇게 각성된 의식이 확장되는 것은 뇌 속에 있는 (어떤) 기관들과 세포들 사이의 연결들이 발달될 뿐만 아니라 뇌의 원자原子들도 발달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아스트럴 자의식을 포함하기 위하여, 뇌하수체가 개발되어야 하고 원자 속에 있는 네 번째 일단의 스파릴래(Spirillae)가 완벽하게 되어야 한다. 

멘탈 자의식을 포함하기 위하여, 송과선이 활성화되어야만 하고 다섯 번째 일단의 스파릴래가 완전히 작용해야 한다. 

이러한 신체적인 발달이 없으면, 그때 아스트럴 의식과 멘탈 의식은 여전히 초의식 상태로 남아 있으며 뇌를 통하여 표현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때 그의 자그라트 즉 각성 의식은 아스트럴 의식이다. 이리하여 자그라트에 대한 광의의 정의는 제일 바깥의 체를 통하여 작용하고 있는 ‘전체 의식의 일부분’이다. 

우리는 또한 위에서 분석한 것을 토대로 삼마디를 다시 고찰할 수 있다. 삼마디란 육체는 느낄 수 없지만 마음은 충분히 의식할 수 있는 상태여서, 마음이 육체를 초월한 경험에 대한 기억을 가진 채 육체의 두뇌로 되돌아가는 의식 상태다. 

만일 사람이 무아경에 빠져들어 아스트럴계에서 활동적이게 될 때, 그때 그의 삼마디는 아스트럴계에 있다. 만일 그가 멘탈계에서 작용한다면, 그때에 그의 삼마디는 멘탈계에 있다. 

삼마디에 들 수 있는 사람은, 이와 같이 마음이 (다른 차원․계에 대해서) 충분히 자의식 적인 동안에 육체를 무감각한 상태로 놔두기 위하여 그 육체로부터 철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삼마디는 상대적인 용어다. 이리하여 매스터는 아트마계에서 삼마디를 시작하여 상위의 우주 계들로 올라간다. 

또한 삼마디라는 말은 사람이 의식을 유지할 수 있는 계를 막 벗어난 상태를 나타내기 위하여 때때로 사용된다. 이리하여, 의식이 단지 물질계에서만 명확한 야만인들에게는, 아스트럴계가 삼마디일 것이다. 그것은, 그가 하위 체들에 되돌아 올 때 어떠한 명확한 지식을 추가적으로 가지고 오지를 못하고 또한 어떤 유용한 것을 행할 수 있는 새로운 능력도 가지고 오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유의 삼마디를 최고의 신비학파에서는 장려하지 않는다. 

잠드는 것과 삼마디로 들어가는 것은 대개 똑같은 과정이다; 그러나 하나는 일상적인 상태에서 기인하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반면에, 다른 하나는 훈련된 의지 작용에 기인하며 매우 귀중한 능력이다. 

최면, 마약, 흰 바탕에 있는 까만 점을 보는 것이나, 코끝을 응시하는 것이나 다른 비슷한 수련들과 같은 무아경을 일으키기 위한 물리적인 수단들은 하타요가의 방법에 속하며 라자요가에서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투시가에겐 ‘최면에 걸린 피시술자’와 ‘자의적으로 황홀경에 든 요기’ 사이에 차이는 뚜렷하다. 최면에 걸린 피시술자에겐, 모든 “원리(본질)들”이 존재하는데 상위 마나스는 마비되어 있고 부디는 그 마비로 인하여 상위 마나스로부터 단절되고 아스트럴체는 전적으로 하위 마나스와 카마에 복종한다. 

다른 한편, 요기에 있어서 하위의 4가지 “원리(본질)”는 거의 지각할 수 없는 ‘황금색을 띤 프라나’의 진동들과 머리로부터 위쪽으로 쭉 뻗쳐 한 점에서 절정을 이루는 ‘황금색 줄무늬가 있는’ 보라색 불꽃 하나 외에는 완전히 사라진다. 

최면에 걸린 사람은 그가 경험한 것들을 뇌 속에서 전혀 회상할 수 없으나 요기는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것을 기억한다. 

몇 가지 실례를 들면, 아마도 명상시에 사용되는 방법들 중 얼마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신비 학도는 습관이 될 때까지 육체가 영(혼)spirit의 도구라는 생각을 가짐으로써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는 육체를 생각해야만 한다. 즉 어떻게 하면 그것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것이 가능한 지를 생각해야만 하고, 생각으로 육체와 자기 자신을 분리시켜서, 실제로 육체를 부인해―관련성을 끊어―야한다. 

다음에는, 자신이 감정과 욕망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그는 아스트럴체의 감정과 욕망들을 가지고 아스트럴체를 부인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자신이 멘탈체에 있는 것처럼 상상하고, 자신이 상념(생각)들을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의 마음을 부인하고 자신으로 하여금 영원한 평화가 존재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영역속으로 치솟아 오르도록 해야만 한다. 거기서 잠시 동안 머물면서 자신으로 하여금 “저것이 바로 실제 자아이다”라는 것을 자각하기 위해 아주 열심히 분투하도록 해야 한다. 

다시 ‘의식(적)으로’ 내려와서, 그는 영(혼)의 평화를 자기의 다양한 체들 속으로 가져오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른 수련은, 목적에 맞게 하나의 미덕을 선정함으로써 명상을 인격 형성을 도모하는 쪽으로 돌리는 것인데, 해를 끼치지 않음(harmlessness)를 예로 들어보자. 주의가 집중된 후에, 많은 측면에서 그 주제에 관하여 생각한다; 즉, 행위, 말, 사고와 욕망에서의 해를 끼치지 않음; 해를 끼치지 않음이 이상적인 사람의 삶에 있어서 어떻게 표현될 것인지; 어떻게 그것이 그의 일상 생활에 영향을 미칠 것인지; 만일 그가 그 미덕을 충분히 얻었다면, 자기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등등에 관하여 생각한다. 

이렇게 해를 끼치지 않음에 관하여 명상을 한 후, 자신의 모든 행동과 상념속으로 저절로 표현될 마음 상태를 일상 생활 안으로 가지고 올 것이다. 물론 다른 특성들도 유사하게 다룰 수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몇 개월 동안 진지하게 노력하면, 플로티누스가 (우리가 꼭) 기억해 둬야 할 말로서 묘사한 것처럼, 그의 삶에 있어서의 놀라운 변화들을 일으킬 것이다. “너 자신의 내부로 물러나서 보라. 그리고 네가 너 자신이 아직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는 창조자(조각가)가 하는 것처럼 하라. 그는 여기를 잘라 내고 저기를 매끄럽게 하고 이 선은 더 우아하게 저쪽 선을 완전하게 하여, 마침내 그는 조각에 아름다운 얼굴이 나타나게 한다. 너도 또한 그렇게 하라. 지나친 모든 것을 잘라 내고 구부러진 모든 것을 곧게 하고 그늘진 모든 곳에 빛을 가져오고 모든 것을 아름다움으로 빛나도록 애쓰고, 신과 같은 미덕의 광채가 네 위에 빛날 때까지 네가 최종의 선함이 흠없는 성소에 확실히 자리잡게 되는 것을 볼 때까지 너의 조상(彫像)을 끌(정으)로서 다듬는 것을 중단하지 마라.” 

이리하여 미덕에 관하여 명상을 하게 되면, 사람은 점진적으로 성장하여 그 미덕을 소유하게 된다. 힌두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다: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 바로 그것이 된다; 그러므로 영원에 관하여 생각하라.” 또다시 말한다: “인간은 상념의 창조물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명상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는 것’에 대한 탁월한 예가 40년 동안 매일 진리에 관하여 명상한 어떤 사람이다. 그 결과로 그는 사람과 이야기할 때 자신의 내부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진동에 의해서 어떤 사람이 거짓말하고 있는 것을 항상 알 수 있을 정도로 진리 자체에 자신을 일치시키게 되었다. 그 사람이 만일 재판관이었다면, 그의 능력은 그에게 크게 도움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이 일을 행할 때, 사람은 자기의 상상력을 활용하고 있는데, 이는 요가에서 사용하는 주된 수단이다. 사람이 상념으로 자신이 어떤 특성을 소유하고 있다고 상상하면 그는 이미 그 특성을 절반은 소유하고 있다. 만일 그 자신이 어떤 실패에서 벗어나 있다고 상상하면, 그는 그 실패를 절반은 벗어나 있다. 훈련된 상상은 매우 강력한 무기이므로, 사람은 그것을 활용함으로써 그의 곤란한 일과 결점을 절반은 제거할 수도 있다. 

결점들을 곰곰이 생각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그것은 ‘영적인 영향력을 차단하는 하나의 벽으로 작용하게 되는’ 병적임과 침울함을 조장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능한 한, 성격의 결점들을 무시하고 반대의 미덕들을 형성하는데 집중하는 것이 더 낫다. 영적인 삶에서의 성공은 하급 속성과의 격렬한 투쟁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고급 속성에 대한 지식과 올바른 분별을 모든 것에 적용하여 우리가 성장함으로써 얻어진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단 고차원적인 삶의 축복과 즐거움을 충분히 경험하게 되면, 이에 반비례하여 저차원적인 삶은 퇴색되어 그 매력을 잃기 때문이다. 죄를 범한데 대한 가장 좋은 참회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결의와 함께 희망에 찬 용기로써 앞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한 위대한 스승이 말씀하셨다. 

다음에는, 명상의 목적이 어떤 대상에 대한 지적인 이해이고, 또한 그와 다른 대상들과의 관계라고 가정하자. 신비 학도는 ‘아는 자’의 첫번째 일이 ―정확히―관찰하는 것이다 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상념은 관찰의 정확성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관찰이 정확하지 않다면, 그 첫 잘못으로부터 수많은 잘못들이 뒤이어 발생하는데, 이것들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한다. 

대상이 이렇게 조심스럽게 관찰된 후에, 상념의 흐름은 자연스럽고 초물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모든 측면에서 대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에 작용한다. 그리고, 여전히 모호한 의식의 수준을 아주 분명하고 명확히 하기 위한 노력이 행해진다. 

예를 들어 주제를 조화로 정하자. 많은 감각들에 관련하여 조화를 고찰하자; 음악, 색채와 많은 다른 종류의 현상들로 조화를 고찰하자. 조화의 주요한 특징들을 발견하고, 그것이 다른 유사한 개념들과 대조적인 개념들과 어떻게 다른 지를 발견하려고 노력하자. 일련의 사건에서 그것이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그것의 유용성이 무엇인지, 그것이 없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발견하려고 노력하자. 이 모든 것들과 많은 다른 질문들에 대답을 한 후에, 모든 구체적인 영상이나 상념들을 내버리고 조화의 추상적인 개념을 사고화하기 위한 노력을 행해야 한다. 
학도는 멘탈계의 시력은 물질계의 시력만큼이나 아주 실제적이고 만족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리하여 사람이 물질계의 시력으로 나무나 탁자를 보는 것만큼 명확하고 분명하게, 조화라는 개념이나 2의 제곱근을 보기 위하여 마음을 훈련하는 것이 가능하다. 

세 번째 예로서 헌신적인 명상을 들자. 이상적인 사람인 매스터를 생각하자. 신성이나 아니면 신성의 어떠한 현현이라도 지정해서 생각하는 것이 더 좋으면 그렇게 해도 된다. 감탄(찬미), 감사, 존경, 숭배가 항상 일어나도록 상념(생각)을 다른 측면들로부터 그 주제에 작용하게 하라. 그 주제에 현현된 모든 특성들을 숙고하고, 모든 측면과 관계를 지어서 각 특성을 다루어라. 

일반적인 관점에서 추상적인 이상과 하나의 인성(personality)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명상 목적에 적합하다. 지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은 대개 추상적인 이상이 더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감정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은 그의 상념을 구체화시킬 필요가 있다. 추상적인 이상이 가지는 불리한 점은 그것이 열망을 통제하는데 실패하기 쉽다는 것이며, 구체화하는 것이 불리한 점은 그것이 이상(理想) 이하로 떨어지기 쉽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매스터에 관하여 명상함으로써 얻는 결과에 특별히 유의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함으로써 매스터와 명확히 연결되는데, 그것은 투시가의 시야에는 일종의 광선으로서 나타난다. 매스터는 항상 잠재의식적으로 그러한 광선이 (자신에게) 연결되면서 부딪히는 것을 느끼며, 우리가 명상이 끝난 후 오랫동안 계속해서 작용하는 자기(磁氣)의 지속적인 흐름을 그에 대한 응답으로써 그 광선을 따라 우리에게 내보낸다. 

그림이 명상할 목적으로 여러 가지로 사용된다면, 그림의 표현이 변화하는 것을 종종 관찰할 수도 있다. 이것은 의지가 직접적으로 물질계의 질료에 작용하게끔 훈련되어, 그 결과로 실제적인 물질계의 입자들이 강하게 지속되는 상념의 힘에 의하여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의심할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명상의 다른 한 형태, 즉 만트라적인 명상이 주어질 수 있다. 

만트람이란 어떤 명확한 결과들을 가져오기 위하여 신비가에 의하여 배열된 명확하게 연속되는 소리들이다. 그러한 소리들은 운율적으로 계속해서 반복될 때, 여러 체들의 진동들을 일치시켜 그 (소리)들과 조화(일치)시킨다. 만트람은 이리하여 특정 진동들을 억제하거나 바라는 진동들을 일으키는 기계적인 방법이다. 그것의 효력은 이른바 동조 진동(sympathetic vibration)에 달려있다. 

만트람이 반복되면 될수록, 그 결과는 그 만큼 더 강력하다. 그러므로 교회의 예식서(Church formulæ)의 반복과 묵주 기도(rosary)는 가치가 있는데, 그것의 가치는 계속하여 셈을 함으로써 의식으로 하여금 정신이 산만하지 않고 듣고 생각하는 것에 완전히 집중할 수 있게 한다는데 있다. 

주로 인도에서 실행되어지는 이러한 명상법에서, 헌신자는 그의 마음을 말하자면 쉬리 크리쉬나, 즉 화신한 신, 세상에서 사랑과 지식의 신(Spirit)에게 향하게 한다. 하나의 문장이 만트람으로 채택되어 계속 반복해서 읊는 동안, 그것의 깊고 다양한 의미에 주의를 집중하여 숙고한다. 이렇게 해서 헌신자는 바로 위대한 주님(The Great Lord)과 (직접) 접촉하게 된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어떤 명상 형태들을 가장 간략하게 설명한 것이다. 더 많은 설명과 세부사항을 얻기 위하여, 학도는 훌륭한 책자인 어니스트 우드의 “집중(Concentation)”, J.I.Wedge. Wood의 “초심자를 위한 명상(Meditation for Beginners)”, 베산트 박사의 “바깥뜰(In the Outer Court)”에 있는 상념통제와 인격형성에 관한 뛰어난 여러 장들을 참조하도록 권하고 싶다. 

탁월한 “자아 명상(Ego Meditation)”은 J.J. van der Leeuw, LL.D.가 “망명중인 신들(Gods in exile)”라는 훌륭한 소책자의 후기편에서 설명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혼자서 매일 명상하면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일에 그들의 마음을 집중할 때, 성공할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그것은 아스트럴계와 멘탈계에서 뿐만 아니라 물질계의 에테르에서도 (힘의) 긴장을 일으키고,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예기치 않은 발전을 가져온다. 이리하여―흔히 있는 경우이지만―우리의 환경에 대항하여 싸워야만 하는 대신에, 물론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그들의 마음이 방황하지 않도록 하는데 성공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실제로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한 명상 집단에서 방황하는 마음은 그 흐름이 깨어져 버려서, 노도같이 움직이는 거대한 상념의 덩어리로서 존재하는 대신 그 명상 집단 안에―강에서 물을 비껴가게 하는 바위들처럼―소용돌이들을 형성할 것이다. 

집단적인 감정과 상념이 엄청난 힘을 가졌다는 것에 대한 단적인 예는 빅토리아 여왕의 60년 기념제이다. 주교 리드비터는 그 행사를 그가 지금까지 본 오컬트적인 힘 중에서 가장 놀랍게 현현한 것 중 하나로 묘사했다. 군중은 아주 의기양양하여 그들의 감정에 의하여 그들 자신들로부터 들어 올려져서 영혼이 엄청나게 고양되는 것을 경험했다. 비슷한 효과가 비록 소규모이지만 집단(그룹) 명상에서 나타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명상을 하는데 물리적으로 고려해야 할 부수 사항들을 고찰할 것이다. 명상시에, 자세가 매우 중요하다. 몸은 편안한 자세를 취해야 하며, 그리고 몸에 대해서는 잊어야한다. 만약에 몸이 불편하다면, 몸은 잊혀 질 수 없다. 왜냐하면 항상 몸은 편안해지기 위해서 그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어떤 상념들과 감정들이 몸의 특징적인 움직임과 몸짓을 통하여 스스로를 표현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그 과정을 역逆으로 돌림으로써 몸의 자세는 여러 가지 (초월적인) 마음과 감정의 상태들을 초래하여, 그 원리들을 곰곰이 생각함으로써 학도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다. 

대다수의 서구 사람들은 등이 심하게 경사지지 않은 안락의자에 앉는 것이 가장 편안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양손은 마주잡고서 다리위에 놓거나, 양쪽 무릎에 가볍게 놓을 수도 있다. 발은 함께 편하게 놓거나 오른쪽 발을 왼쪽 발 위에 놓고 꼬을 수 있다. 몸의 사지를 이렇게 고정시키는 것은 손가락 끝이나 발 (그리고 그외의 신체 부위) 등으로부터 나가는 자기(磁氣)의 유출을 방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자세는 쉬워야 하며 긴장을 풀어야한다. 머리는 가슴으로 내려가서는 안되고 가볍게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양 눈과 입은 닫고 (자기 흐름이 많이 흐르는) 척추는 똑바로 세워야 한다. 

동양 사람은 대개 바닥이나 낮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는다. 이 자세는 방출된 자기(磁氣)가 보호막 안에서 신체를 빙빙돌아 상승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약간 더 효율적이다 라고 말해진다. 

명상 자세를 결정하는데 고려되어야 할 다른 요소는 육체 의식(physical consciousness)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바닥에 앉아 있는 인도인은 (의식을 잃을 경우) 몸에 상처를 입지 않고 단순히 뒤로 넘어진다. 의자에 앉아서 명상하는 사람들은, 육체가 의식을 잃는 경우에 의자로부터 떨어지지 않도록 안락의자를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연스럽게 잠으로 떨어지는 경향 때문에 눕는 자세를 채택해서는 안된다. 

미리 냉욕(冷浴)이나 활발한 산책을 하는 것은, 두뇌의 활동에 분명히 해가 되는 혈액이 완만하게 순환하는 경향을 극복하는데 유용하다. 

깊은 명상과 호흡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명상시에 몸이 조화를 이루게 됨에 따라 호흡은 점점 깊어지고 규칙적이며 리드미컬하게 되어 마침내 점차로 아주 느려지고 조용해져서 거의 지각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실제로 발견되었다. 하타요가는 그 과정을 반대로 하는데 호흡을 아주 섬세하고 또한 정교하게 통제함으로써 신체의 여러 기능들을 조화시키고 마침내 마음의 여러 작용들을 조화시킨다. 

그러나 학도는 호흡 수련을 무분별하게 실행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명상중에 자신이 행하는 노력들에 의해서 호흡의 자연스러운 효과가 신체에 일어나게 하면서, 하타요가의 방침(가르침)을 따라 상념을 통제하는 것을 배우도록 충고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을 것이다. 

얼마의 호흡 수련은 매우 위험하지만, 심장과 폐에 부당하게 긴장을 유발하지 않고 상념을 몸의 다양한 센터들 즉 차크람들에 집중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면, 간단하면서도 다소 깊은 호흡을 행하는 것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좋은 향香은, 오컬트적인 견지에서 보면 “기운(atmoshpere)”를 정화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또한 도움이 된다. 신비 학도는 또한 자기 주위에 있는 아름다운 색채들, 꽃들과 그림들 그리고 마음과 감정들을 고양시키는 다른 수단들로부터 도움을 얻을 수도 있다. 

그는 또한 어떤 종류의 식사를 금하는 것을 준수하고 건강에 해가 되지 않고 행해질 수 있다면 육식과 술을 삼가는 것이 유용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만약 알코올이 섭취되면 명상은, 특별히 뇌하수체에 영향을 미치면서 뇌 속에 염증(의 증상)들을 유발하는 경향이 있다. 

잠을 잔 후와, (깬 후에) 부대끼는 세상살이에 뛰어들기 직전에는 욕망들과 감정들이 대개 더욱 고요하기 때문에, 이른 아침이 명상하기에 가장 적합한 때이다. 그러나 어떤 시간을 선택되더라도, 방해받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는 때에 명상을 해야 한다. 더구나,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명상하는 시간대는 항상 같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규칙성이 명상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고대의 헌신적인 명상가들에 의해 선택된 시간은, 해뜰 때, 한낮과 해질녘이었는데, 이것들은 자기(磁氣)적으로 보아 가장 적합한 때이다. 하루 중 매시간 종이 울릴 때마다 잠시 동안, 마음을 자기 자신이 영적인 사람이다는 것을 자각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좋다. 이것을 실행하면, 소위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이 부르는 “자아 회상(self-recalledness)”으로 발전하게 되어 학도가 마음을 자동적으로 영적인 상념들로 되돌아가도록 훈련하는데 도움을 준다. 

식사를 한 직후에 명상하는 것은 좋지 않다. 이유는 명백한데, 명상이 소화기관에서 피를 끌어당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명상은 또한 한 밤중에 좋지 않는데, 여러 체들이 피곤하고 에텔체가 쉽게 이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때는 달의 부정적인 영향이 작용하여,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들이 발생하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때때로 명상은 아스트럴적이거나 멘탈적인 나쁜 영향들 때문에 보통 때보다 성공하기가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어떤 시기에 미치는 혹성의 영향이 다른 때보다 더 유리하다고 말한다. 이리하여 한 점성가는 목성이 달과 어떠한 관계를 가질 때 에텔 대기를 팽창시키고 그래서 명상을 더욱더 성공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토성과의 어떤 위치는 에텔 대기를 수축시켜서 명상을 어렵게 한다고 말했다. 

위에 간략히 개요만 설명한 명상체계는 영적이고 멘탈적이며 윤리적인 발달과, 마음 및 감정의 통제를 그 목적으로 한다. 그것은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오는” 심령 능력들을 개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명상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충분히 민감한 구조를 가진 사람들에게서 직관적인 심령능력의 한 형태로 계발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직관적인 심령 능력은 사람들과 장소들이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점차로 민감하게, 또 잠을 자는 동안 아스트럴계에서 경험한 것들을 단편적으로 기억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자아로부터 오는 직접적인 지도에 대한 더 민감한 감수성에서, 또한 매스터들과 영적으로 개발된 사람들의 영향을 인식하는 능력에서, 그리고 다른 분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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